범증산교사 증산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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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냥끄적임 작성일17-04-30 20:11 조회2,775회 댓글1건본문
증 산 도
본부 소재지 : 대전시 중구 괴정동 123-2
창도년월일 : 1974년
종도사 안운산(安雲山 본명은 世燦 : 1922~)은 충남 서산군 대산면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안병욱은 열렬한 보천교인으로 안운산은 어렸을 때부터 증산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젊은 시절에 이상호(李祥昊), 이정립(李正立) 형제의 대법사(大法社) 조직에 참여하여 많은 교인을 지도했다.
1974년에 안운산이 20여년에 걸친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종교운동을 하게 된 것을 이 교단의 시발점으로 잡는다.
그러나 보다 실질적으로는 1978년 봄부터 아들 안경전(安耕田. 重建)이 교화 원장으로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 하면서부터다. 이 때의 교명은 대법사 증산교(大法社甑山敎)다
안경전은 대전지역에서 교리강좌를 여러 차례 가졌으며 1980년에는 현재의 본부도장 자리에 성전을 건립하고 증산도장이라 이름 하여 매주 정기성회(定期聖會)를 가졌다.
1980년에 증산교 대학생 포교회를 조직하고 1981년에는 한양대학교에 처음으로 증산사상연구회라는 써클이 등록되는 것을 계기로 대학가에 포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경희대학교, 서울대학교, 이화여대, 성균관대학교, 등을 필두로 매년 10여개 대학교에 폭발적으로 신앙 써클이 조직되어 대학의 젊은 지식인층에 증산교의 열풍을 일으켰다.
1984년부터 교명을 증산도라 하였다.
(한국민족종총람.1992년 도서출판 한누리. 615~616)
증산도의 연혁(沿革)으로부터 도맥(道脈)까지
증산도(종도사 안운산, 종정 안경전) 최근에
증산교(찰립주 이청음)의 종통을 찬탈(纂奪)하는 간행물 속간
55년전 고수부 선화할 때
운산은 14세 소년,
고수부의 도맥받은 근거없고 운산이
‘ 광복 후 본부도장을 용화동에
설치한 일’ 없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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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월간 천지공사 제 26호(대순 120년 11월 1990-11-15) 25~35쪽
안운산의 이력과 교단 창립
증산도를 창립한 안운산은(壬戌 1922년) 7월 15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대산면(大山面) 운산리(雲山里)에서 안병욱(安柄彧)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운산의 이름은 세찬(世璨)이요 한때 홍찬(興燦)이라 하였고 운산은 그의 호이다.
광복되던 해 음력 9월 19일 이상호(李祥昊) 이정립(李正立) 최위석(崔偉錫)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교화단체 대법사통제위원이 되었다.
(증산교사 325~326쪽) 대법사 창립총회에 참석한 145인을 중앙통제위원으로 하였는데 운산은 대법사 대표 청음의 출생지가 전남 해남군(海南郡) 삼산면(三山面) 구성리(九星里)인 것을 비결의 진인해도출(眞人海島出)에 비겨 신입 교인들에게 청음을 진도(眞道)의 도주(道主) 진인(眞人)으로 믿게 했다
(생존자 H씨의 말) 운산은 공향에 돌아와 포교하는 동시에 이접지역인 아산 당진지방의 포교를 돕기도 하였다.
대법사(大法社)의 조직이 중앙통제위원장에 이청음, 상무위원겸 총무부장에 이남주, 교무부장에 최규석(崔奎錫), 조직부장에 김규찬(金奎燦)등이 선임된데서 알 수 있는 바와같이 그 당시 대법사의지방 포교는 청음의 고매한 인격과 남주의 학덕 그리고 각부장의 감화와 영도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 지역 원로들의 덕망과 열성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무위원겸 총무부장인 남주는 각지방에 가서 수십일씩 머물면서 강연회도 가졌고 교인의 교화도 힘쓴데서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산이 서산지역에서 초기에 포교한 사람가운데는 증산교 종령을 역임한 황원택이 있고 운산이 나들던 당진지역에서 포교에 가산을 기울였던 분으로는 이영이 생존해 있고 역시 운산이 나들던 아산지역에서도 포교에 남다른 성의를 보였던 사람들로서는 통제위원이었던 원응섭(元응燮) 이응상(李應翔)이 별세하였지만 이들에게서 도를 받은 분들은 아직도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운산의 활동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자(戊子 1948)년 가을에 아산지방에 대법사 교인이 기십호가 되고 기축(己丑 1949)년에
당진지방에 수백호가 된 것이나 천안, 공주등지의 기십호 수백호 포교가 증산도측에서는
모두 운산의 공로인양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운산은 6.25사변이 일어난 경인(庚寅 1950)년 섣달에 공주군 신풍면(新豊面) 선학리(仙鶴里)에 사는 임헌교(林憲敎 : 생존 열성도인)의 집에 가서 피난할 때 운산이 임헌교에게 ‘ 의통인패(醫統印牌)를 만들자 청음 남주가 만드는데 우리가 못만들 이유기 어디있느냐 ’ 하였다.
이 말이 교본부에 전해지면서 운산은 대법사 대표 이청음이 경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의통이란 대법사 창립때부터 창생을 구제할 비전의 신물(神物)이다.
운산이 대법사 간부들과 다투게 된 두번째 원인은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호신호부(護身戶符)의 배부와 인원배정을 자기 연비에게 유리하게 짠데 있었다.
운산은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에서 출교처분을 받아 창립이래 6년간 몸담아 종교활동을 해온 대법사를 떠나게 되었다.
대법사를 나온 운산은 공주군 유구에서 직조기를 놓고 인조견사를 을미(乙未 1955)년까지 짰다.
병신(丙申 1956)년에는 대전시 중동으로 이사하여 상업과 한의술(漢醫術) 및 입치(入齒)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생존자 R씨의 증언) 운산이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를 떠나 교단과 무관한 생활을 하다가 23년만에 다시 나와 증산교인과 접촉한 것은 갑인(甲寅 1974)년 봄에 아들 경전과 함께 홍범초가 세운 예산교당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 뒤 운산은 아산 서산등지의 교인들 모임에 가서 대법사 (현 증산교)의 창립주 이청음 이남주를 인신공격(人身攻擊)에 가까게 비난하고 대순전경의 장절 가운데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많다고 말하는 한편 옛 연원주인 자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운동을 전개하자고 말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운산은 을묘(乙卯 1975)년 봄부터 용화동 증산교 본부를 방문하여 자기의 소식을 말했으나 오히려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운산이 공석에서 얘기한 말을 요약하면
첫째, 그가 용화동을 떠날 때 그때 간부들에게 ‘ 내가 또 오리다. 교단을 잘 지키소’ 했다는 것인데 그때 간부들에 의하여 출교 처분을 받은 그가 어떻게 그 간부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고
둘째, 그는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연원회의를 열어 새로 교판(敎板)을 짜야 하며 자기의 옛 연비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출교처분을 받고 20년 이상 안나온 사람의 그런말은 교규가 인정치 않는다는 것이고
셋째, 그는 이치복 종도의 연원이고 과거에는 이청음과 동지적인 입장으로 일해 왔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치복 종도의 연원을 주장하는 그가 더더구나 20년 이상을 교단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나와서 교단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운산은 그해 여름, 가을에 몇 차례 용화동에 와서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으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고
아들 경전이 정역을 도입한 색다른 교리 해석을 하다가 제지당하였으며 옛 연비 교인들을 무례하다고 꾸짖다가 충돌하여 폭언이 오고가니 이로부터 왕래가 끊기게 되었다.
운산은 무오(戊午 1978)년 봄부터 대전시 대사동 산 2번지 자택에서 새로운 교단을 창립할 준비를 갖추어 운산 자신이 새 교단의 대표적인 종도사(宗道師)가 되고 가정 사정으로 1976년 8월 30일 휴학하여 1977년 11월 23일 공주사범대학 사회학과 2학년을 자퇴한 아들 중건(重建)을 교화원장으로 내세워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교명을 대법사 증산교라 하였다.
중건은 갑오(甲午 1954)년 9월 15일생으로 호를 산전(山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경전으로 고치고 아버지를 도와 포교에 전념하였다.
대법사 증산교 = 대전증산교 → 증산교 → 증산도로
교명(敎名)을 고쳐오면서
자가(自家)의 교리문답에서 ‘ 증산교라고 부르는 것은 증산도의 진리세계를 왜곡하는 것’ 이라 앞뒤 안맞는 주장을 펴
무오(戊午 1978)년 12월 20일 대전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있었던 ‘ 증산하느님 동토강림 108주년 성축대강연회’를 열 때 안경전은 「 대전대법사 증산교 교화원장 안산전 」이라는 명칭이 붙은 권교문을 돌렸고 그 이듬해 기미(己未 1979)년 5월 26일 역시 대전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열렸던 옥황상제 한반도 강림 109주년 경축 대강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 대법사증산교 」 「 대전증산교 」라는 교명이 붙은 권교문을 돌렸다.
안운산은 경신(庚申 1980)년 대전시 중구 괴정동 132의 2번지에 교당을 신축하여 증산도장이라 이름하고 1주 2회의 집회를 가졌다.
안경전은 신유(辛酉 1981)년 1월 28일 「 증산교의 진리 」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일간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냄으로써 자기가 신봉하는 교단의 교명이 증산교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
안경전은 각 대학에 등록되어있는 학생써클을 유기적으로 조직화하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임술(壬戌 1982)년 11월 20일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전국대학생증산교포교회를 결성하여 안병섭(安秉燮)을 회장으로 뽑았다.
안경전은 갑자(甲子 1984)년 1월 14일 「 증산교의 진리 」를 개서(改書)한 「 증산도의 진리 」를 내어 교명을 증산도로 고친 것을 알리려 했다.
대법사 증산교 = 대전 증산교 → 증산교로 내려오다가 교명이 증산도로 되면서 경전 안중건은 종정이 되고 원전(元田) 안병섭은 부종정이 되는 등세로운 교단체계를 갖추었다.
운산이 신묘(辛卯 1951)년 가을에 용화동에 본부를 둔 대법사에서 출교당하여 이청음이 세운 ‘ 동화교(東華敎) → 대법사 → 증산교 대법사 → 증산교’ 로 이어지는 교단의 교맥과는 관계가 없는데도 ‘ 대법사 증산교 = 대전증산교 - 증산교’ 라는 교명을 내세우고 종교 활동을 함으로써 운산은 융화동에 본부를 둔 증산교의 종통을 찬탈(纂奪)하려 한다는 평을 세인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세상에 증산교라는 교명의 교단본부가 융화동과 대전에 있게 됐으니 말이다.
안경전은 자가(自家)의 입문서 「 대도문답 」에서 ‘ 증산도가 최초로 종교의 틀을 갖추어 교단을 창립한 것은 1911년... ’ ‘ 증산도는 1930년 초에 전성기를 이루어... ’ 라고 쓰고 있다
.
안운산 안경전 부자가 대전에 증산도라는 간판을 내건 것은 갑자(甲子 1984)년 1월 14일이었는데 안운산 안경전 부자는 자기들이 증산도를 세우기 이전에 있었던 증산계 교단 또는 증산종단의 여러 교단을 증산도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안경전은 「 대도문답 」 22쪽에서 말하기를 ‘ 앞으로는 증산교라 부르지 말고 꼭 증산도라 부르시기
바랍니다.
특히 신문기자나 방송국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종종 증산교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데 이는 증산도의 진리세계를 왜곡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잘못된 행위입니다 ’ 라고 쓰고 있다.
이청음이 무진(戊辰 1928)년 동지에 세운 증산교가 있는데도 대법사 증산교 = 대전증산교 → 증산교라는 교명을 써오다가 건망증이 심한 환자처럼 증산교라는 교명을 부정하고 헐뜯고 얕잡아 보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안경전 스스로가 전에 증산교라는 교명을 써온데 대한 구차한 해명을 해야 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1963년에 전북대(全北大)의 이강오교수가 증산교계총론을 낸 뒤 학계에서는 증산대성을 신봉하는 증산계 교단을 증산교라고 불러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누차 얘기한바와 같이 증산교란 이청음이 융화동에 세운 교단의 명칭이라는 것을 안경전은 번연히 알면서 ‘ 증산교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데...이는 대단히 잘못된 행위입니다 ’ 라고 출판물로 동도(同道)교단의 교명을 훼방하고 있으니 법적인 문제 이전에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상호(商號)를 정할 때에도 다른 상인에게 피해를 주는 비슷한 명칭은 쓰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뒤늦게 교단을 세우면서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교단의 교명인 동시에 세상에 널리 알려져 보통 이름이 된 증산교라는 명칭을 자기도 써오다가 이제와서 그것과 얼른 구분할 수 없는 증산도라는 교명을 들고 나와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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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렇게 말해 온 증산도의 도맥
운산의 말대로 하면 증산도는 이치복(李致福)종도의 연비가 아니고 차교주 연원
운산은 자신의 연원이 이치복 종도라는 것을 용화동에서 교인 대중 잎에서 어러번 밝혔다.
운산은 자신이 이치복 종도의 연비라고 하는 근거를 자기는 부친으로부터 도를 받았는데 그의 부친 안병욱(安柄彧)은 보천교 신도였고 이치복 종도의 연비였다는데 두고 있다.
안병욱은 보천교를 신봉하여 차경석(車京石)교주 선화 후 3년 복(服)까지 입었다고 한다.(아산지방 생존교인 H씨의 말) 이 말에 의거하면 안병욱은 이치복 종도의 연비로 보천교를 믿었다 해도 도맥은 차교주 → 이치복 종도 → 안병욱’ 이라는 연맥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치복 종도가 보천교교주 차경석 밑에서 종교 활동을 하다가 병진(丙辰 1916)년 가을에 그의 연비들을 이끌고 원평으로 나와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증산교사 149쪽)
이때 안병욱이 이치복 종도를 좇았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산의 부친이 보천교에서 분립한 이치복 종도의 연비이기 보다는 차경석 종도를 교주로 받들어 복까지 입은 보천교의 도맥에서 신앙해 온 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운산이 이청음(梨菁飮)에게 교첩(敎帖)을 받고 일을 할 때의 도맥
안병욱이 그의 아들 운산과 함께 광복후에 대법사 창립에 참여하여 운산이 대법사(大法社)창립의 핵인 중앙통제위원 145인에 들어갔다고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등이 된 것은 안병욱 안운산 부자가 전에 연원주였던 이치복 종도 혹은 차교주를 저버린 것이 된다.
이치복 종도 혹은 차교주를 연원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청음에게 교첩을 받고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운산은 부친의 도맥인 보천교 혹은 제화교를 버리고 대법사 창립에 참여함으로써 「 이치복 → 안병욱 → 안운산 」의 도맥을 끊고 새로 창립된 대법사의 연원체계 곧 「 도조증산 → 수부고부인 → 이청음 」이라는 도맥을 승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운산은 (辛卯 1951)년 가을에 대법사에서 출교된후 갑인(甲寅 1974)년 까지 23년간을 두문불출함으로써 대법사의 도맥을 온전하게 이어갈 처지도 못되었다. 병진(丙辰 1976)년 동지(冬至) 전날밤 운산은 용화동 도방에서 자기의 소신을 말할때 "교판은 연원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대자연의 질서가 도덕이요 우주정신이 도덕률이므로 체천칙지(體天則地)한 우리 인사도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임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연원회의를 열어 교인들의 자격을 새로 부여해야 합니다." 라고 자기도 이 교단의 연원주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앞뒤다 안맞는 말이다.
운산은 부친에게서 도를 받았다고 하면서 부친의 도맥을 제대로 이어오지 못했고 자기의 입으로 청음을 진도(眞道)의 주인 진인(眞人)이라 받들어 사람들을 청음 앞으로 인도하며 「 도조증산 → 수부고부인 → 청음 」이라는 도맥이 바른 것이라 하더니 층음과 불화하여 출교처분을 받고 나와서는 ‘ 나는 이치복 종도의 연비요’ 하고 공언했으니 이런 사람이 연원을 소중히 하는 사람인가.
청음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교단에서 청음이 연원을 부인하는 운산이 논리상 연원주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을 하다가 5년 이상 도장에 나오지 않고 교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으면 다시 입교식을 하는 ‘ 대법사 → 증산교대법사 → 증산교’ 의 신앙전통으로 본다면 출교처분을 받고 23년간 도장에 왕래하지 않는 운산은 교인자격도 없는 것이다.
교인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연원주를 자처할 수 있는가. 운산 자신이 청음의 도맥을 부인하면서 청음의 도맥을 옳게 생각하는 자기의 옛 연비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
안경전은 난데없이 증산도가 수부 고부인의 도맥을 이은것 만양 주장
안경전은 기사(己巳 1989)년 5월 1일 그가 낸 「 대도문답 」 12쪽에 쓰기를 ‘ 증산도가 최초로 종교의 틀을 갖추어 교단을 창립한 것은 1911년 입니다.
당시에 교단을 창립하여 이끌어 주신 분은 바로 증산도의 제2세 교주이신 고수부입니다’ 라고 한 말에 ‘ 나의 연원주는 이치복 종도와 부친(안병욱)입니다’ 라고 한 말을 연결시켜보면 도조증산 - 수부고부인 - 이치복 종도 - 안병욱 - 안운산 - 안경전 이라는 계보가 서진다.
현재 증산 종단사를 살펴보면 이치복 종도가 보천교에서 나와 창립한 제화교(濟和敎)는 소멸되었고 이치복종도의 도맥을 정식으로 계승한 삼덕교에서는 수부고부인의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는 데 운산이 이치복 종도의 연비를 자처해 오면서 이제 와서 어떻게 고부인의 도맥을 계승한 것 만양 말하는지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안경전은 수부 고부인의 지위를 ‘ 상제님 자신의 반려자‘ (대도문답68쪽)’ ’ 새 시대를 여는 가을세상의 첫 여인’ (위책68쪽), ’ 지금 서양에서 쓰는 퍼스트레이디’ (위책70쪽), ‘ 상제님 자신의 후계자‘ (위책75쪽)로 보았는데 수부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뒤로 미루고 안운산 - 안경전 부자가 어떻게 수부 고부인의 도맥을 계승했다는 말을 하는지 이 수수께기를 풀어야 하겠다. 안운산 - 안경전 부자가 수부 고부인을 스스로 세운 증산도의 제 2세 교주로 받들려면 운산이 고수부의 도맥을 어떻게 받았다는 신빙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말이 된다.
수부 고부인을 도조증산대성의 도맥을 계승한 것을 보는 교서 곧 대순전경과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 증산교사를 저술하고 교리체계를 세워 이를 신앙한 분은 청음, 남주 두 분뿐이고 교단으로는 전대법사, 현 증산교와 고부인을 창립주로 하는 선도교(仙道敎) 두 교단이 있을 뿐이다.
수부 고부인을 안운산의 연원주로 받들려면 운산이 이청음의 연비가 될 수 밖에 없어
안운산 안경전부자는 남주 이정립의 저서 「 고부인신정기 」의 ‘ 세살림 설’ 을 그대로 이끌어다가 아래와 같이 표시했다.
세살림의 교단시대
첫째살림교단시대(1911 ~ 1918) 정읍 대흥리
둘째살림교단시대(1918 ~ 1931) 김제 조종골
세째살림교단시대(1931 ~ 1933) 김제 금산
안경전은 「 대도문답 」 81쪽에서 고수부의 셋째살림교단시대 끝에 고부인의 김제 금산의 용화동에서 도맥을 안운산에게 전했다고 아래와 같이 강변하고 있다. (퍼온 나도 기가 막힌다.)
1변에서 2변교운의 계승과정인데 2변 교운은 고수부님께서 셋째살림을 전수하신 용화동에서 계승됩니다. 그리하여 해방이후에 2변 부흥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교단개창의주역이 바로 운산종도사입니다.
당시 이상호 형제는 이미 60대에 접어든 노인이 되어 명목상 교단의 대표자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경전은 고수부가 용화동에서 누구에게 도맥을 전하였는지를 밝히지 않았는데 고부인신정기와 증산교사에는 고수부가 도맥을 이청음에게 전해준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미(辛未 1931)년 7월 그믐께 동화교(東華敎) 통정(統正) 이상호등이 조종골에 가서 고부인을 뵙고 여쭙기를 『 듣사오니 대성께서 사모께 세살림을 하라 하시고 또 여러 종도들에게 용화동이 내터니라 하셨다 하시므로 제가 무진(戊辰 1928)년 동지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용화동에서 도화교를 창건하고 그 이듬해 기사(己巳 1929)년 3월 16일 대순전경을 편찬하여 진법의 기초를 정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더니 이제는 대성의 육순회갑을 당함에 비로소 사모께서 세살림을 차릴 도수가 된듯하오니 청컨대 사모께서 용화동으로 법소(法所)를 옮기심이 옳을까하나이다 』하니 고부인이 허락하고 먼저 대순절에 먼저 정을 모시고 용화동에 가서 회갑치성을 올리고 동지치성후에 용화동으로 아주 이사하였다.(증산교사 276쪽)
계유(癸酉 1933)년 가을에 옥구지방 교인들이 협의하여 옥구에 있는 오성산(五聖山)에 수양소를 짓게 하고 동지치성후 고부인이 오성산으로 이거하려고 떠날 즈음에 남주 이정립을 불러들여 영정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영정개사와 저술과 도장건축과 단주수명(丹朱受命)등 후사에 대하여 낱낱이 세 번씩 다짐을 받은 위에 영정을 잘 받들라고 부탁하고 용화동을 떠났으며 을해(乙亥 1935)년 10월 5일 밤에 선화하였다.
안운산은 고부인이 선화할 때 14세의 소년이어서 고부인을 직접 뵈온 일도 없고 특별히 정표될 만한 것도 받은 것이 없으니 고부인이 도맥이 용화동에 전수되고 그 도맥의 줄기에서 안운산은 도조증산 - 수부 고부인 - 이청음의 도맥을 인정하고 이청음의 연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이상호형제는 명목상의 교단 대표자였다고 한 안경전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안운산이 출교될 당시의 대법사의 교직은 종사(宗師) → 사성(司成) → 찬교(贊敎) → 교정(敎正)(水 火 金 木 등 4인) → 교령(敎領)(122인) → 종리(宗里) → 종감(宗監)등으로 되어 있어 교정(敎正)정도의 교직에 있었던 안운산이 남주 이정립등 여러 간부의 보좌를 받고 있었던 청음 이상호를 명목상의 대표자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의 교단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감수&편집: 方山
가져온 곳 :
카페 >안티사이비 (종교단전명상초능력)|글쓴이 :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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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님의 댓글
정적 작성일법증산교사를 쓰신 범초 선생님은 증산ㅇ 신도들에게 부인과 함께 살해 당하셨지요. 그주범이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확실한 넘이 있습니다. 범초선생님이 아마 가만 뇌두지 않을것입니다.